[충격! 진상 일본의 생체실험④] 관동군731 특수부대 진상조사 개요

황채원 기자 | 기사입력 2019/09/11 [09:15] | 트위터 아이콘 44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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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진상 일본의 생체실험④] 관동군731 특수부대 진상조사 개요

황채원 기자 | 입력 : 2019/09/11 [09:15]

자료사진 복사본으로, 지난 1940년 11월 중국 북동부 지린(吉林)성 눙안(農安)에서 사실상 일본군 '731부대'가 지휘했던 생체실험이었던 전염병 예방조치 중 전염병 환자의 상처. 중국 지린성 기록 보관소가 201년4년 1월 10일(현지시간) 일제 식민지 시대 세균전에 관한 일본 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에는 일본군이 2차 세계대전 중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세균부대 기지들을 중국 내 식민 지역에 조성해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벌인 사실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 기록보관소는 731부대를 비롯해 일본 세균부대들은 20여개 성, 161개 시에서 세군전쟁 범죄를 자행해 27만 명 넘게 숨지고 2370만 명 이상이 페스트에 감염됐다고 밝혔다. 사진 / XINHUA


 5. 세균무기사용

 

가. 하라하강 장티푸스살포

 

1939년 8월. 731부대는 ‘용감대’를 결성해서 일본과 소련의 교전지인 노문한으로 비밀리에 접근함. 교전 중 대량 세균폭탄을 발사하였고 철수하면서 하라하강의 상류에 장티푸스 세균을 살포하여 수원을 오염시켰음. 그 결과 많은 소련과 몽골 군인들이 중독되었고 가축들이 대량 살해됨.

 

나. 저장성, 호난성 등에 페스트균 살포

 

1940년 저장(浙江) 성의 취처우(衢州) 닝보(寧波) 진화(金華)에, 1941년에는 호난(湖南) 성 창떠에 페스트균에 의한 세균전을 벌임. 실전방법은 비행기로 곡물 등에 페스트를 섞어 투하함. 사망자는 24명, 41년부터 2, 3차 감염에 의해 주변지역으로 전파되고 사망자의 수는 계속 증가했으며 취처우 인근, 약 20km 떨어진 타오위안(桃源) 쓰꿍(石公) 등에도 전파됨. 731부대는 전쟁에서 처음으로 세균무기를 사용하면서 준비부족과 경험부족으로 자체 1개 사단 병력이 세균감염당한 사례가 있음. 1948년까지 페스트가 유행했음. 1940년부터 1948년까지의 8년간 페스트, 콜레라, 티푸스, 파라티푸스, 이질, 탄저 등 전염병의 발병자는 누계 30만 명 병사자는 5만 명에 달함.

 

다. 저장성, 쟝시성의 세균전

 

1942년에는 저장 성에서 쟝시(江西)성에 이르는 저장선 철도에서 페스트균, 콜레라균, 티부스균 등에 의한 세균전을 벌임. 이 때 세균을 섞은 떡을 주민에 나눠 주고 우물에 세균을 투입하는가하면 쌀과 보릿쌀 등에 세균을 넣고 세균을 주사한 쥐를 방사함. 731부대원들은 방호마스크를 쓰고 저장성 이오현 승산촌에 들어가 마을주민 이취봉씨의 병든 며느리를 마을 밖으로 끌고 가서 그 자리에서 복부를 해부하고 내장을 꺼내 세균전염효과를 검사함.

 

라. 광둥지역 식중독균 식음

 

광둥(廣東) 지역 홍콩 난민에게 식중독균을 섞은 국을 먹게 하여 학살.

 

마. 산둥지역 콜레라균 살포

 

산뚱(山東)지역에서 강의 제방을 붕괴시켜 콜레라균을 함께 흘려보내 오염지역을 만들어냄. 

 

6. 6인의 조선인 마루타

 

1. 심득룡/ 처음으로 신원이 확인된 조선인 마루타. 1943년 당시 중국과 소련 공산당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아래 참조)

2. 이청천 /항일투사. 1944년 7월 중국과 몽골 국경지대에 있는 네이멍구 자치구의 하이라얼에서 반일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체포됨.

3, 이기수/(이하 체포 당시 나이 28세·함북 신흥군 동흥면, 1941년 7월 20일 체포 김창권회장이 영정사진을 확대하여 보관하고 있음)

4, 한성진(30·함북 경성, 1943년 6월 25일 체포),

5. 김성서(함북 길주면, 1943년 7월 31일 체포),

6. 고창률(42·강원도 회양군 난곡면·1941년 7월 25일 체포)

 

이기수 이하 4명은 모두 길림성 훈춘에 살고 있을 당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됨. 고창률은 1941년 소련을 위해 일본군 정보를 수집했음. 그 뒤 비밀 활동이 탄로나자 체포될 위험이 있으니 잠시 피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훈춘에서 하얼빈으로 대피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음. 일본군 헌병대는 고창률에 대해 “소련의 명령을 받고 활동했으며 공작금으로 백수십만원을 타고(받고) 만주 일대를 다니며 간첩활동을 자행해, 남겨둬 봐야 역첩보 활동을 할 가치가 없으니 ‘특별이송’함이 적당하다”고 기록하고 있음.

(하얼빈시 사회과학원 731연구소 제공)

 

*조선인 마루타 심득룡

 

처음으로 신원이 확인된 조선인 마루타는 1943년 당시 중국과 소련 공산당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던 심득룡(沈得龍) 씨다. 현재 대련시 당안관에 보존돼 있는 ‘1943년 10월 16일 일제 대련헌병대 (정찰 체포 심문)에 관한 지하공작원 심득룡 외 3인의 보고’ 자료를 보면 심씨가 ‘소련 홍군 참모본부에서 무선전보 첩보로 활동해 온 소련 공산당원’이라고 적혀 있다. 신씨에 관한 또 다른 하나의 문건은 1988년 중앙 당안간에서 발견된 ‘제731부대 특별수송 정황’이다. 여기에도 심씨의 이름과 주소, 조선족 출신이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또 731부대로 이송된 125명의 명단 가운데 조선인이 3명이나 있다고 한다.

 

심씨는 1911년 5월 29일 중국 동안성(지금의 흑룡강성) 요하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9살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후 동생 심금룡과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1929년 4월, 18세가 되던 해 삼촌 심일성, 황모씨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지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4년 그는 동북 항일인민혁명군 소대장 겸 청년단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같은 해 의지하며 살아 왔던 동생 심금룡(당시 15살) 씨가 일본 침략군 토벌대에 의해 체포, 살해되고 말았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그는 인민혁명군 정치부 이두문 추천에 의해 소련 공산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38년 소련 홍군 참모본부에서 공산대학 졸업생 중 일부 학생을 선발해서 실시한 무전에 관한 정보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 후 1940년 3월 27일, 심씨는 모스크바를 떠나 아라본토(지금의 카자흐스탄)와 신강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팔로군 군관 신분으로 연안에 도착한 후, 중공 중앙 사회부 상보진 부장과 소련 공산당 기관 진리보 책임자를 만났다. 그 후 현재 하북성 근처의 기중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중공 기중구 사회부 부장 상보진은 심씨를 천진으로 데려가 왕요헌이라는 사람에게 심씨를 공장에 취업시켜 공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편의 제공을 부탁했다.

 

상보진은 주민등록증과 대련으로 갈 수 있는 여권을 마련해 합법적인 모든 수속을 거친 후 심씨와 함께 하얼빈, 대련에 있는 소련 영사관에 가서 공작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련에서 정보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기도 했다. 왕요헌이 모든 비용을 일체 부담하기로 하고 대련에 있는 흑석조에 흥아 사진관과 남산지구에 부흥 문구점을 차려 경영했다. 왕요헌의 친척인 이진성에 의해 사진기술도 배웠다.

 

여기서 그는 친척과 친구, 고향사람 등 약 20명을 소개해주어 정보활동을 할 수 있는 정보거점으로 발전시켰다. 이때 심씨는 심양, 본시, 천진, 북경에도 정보거점을 넓혀 나갔다. 당시 그가 경영했던 가게들은 왕요헌과 왕학년의 이름으로 운영했다. 당시 심씨는 진원, 이경춘, 이성화라는 별명으로 활동했다.

 

그가 중국과 소련의 정보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중공 중앙 사회부와 전 소련 홍군 참모본부의 공동 사업에 의한 결과였다. 중국과 소련은 일본 침략자와 투쟁하기 위해서 1941년 공동으로 대련에서 국제 정보거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공 지중구 사회부장 장국건은 “내가 중공 지중구 사회부 영도공작을 할 때 당 중앙 사회부 허건국 부장의 명령에 따라 당 중앙 사회부에서 파견한 진원(심득룡) 동지를 적군이 많은 지역인 대련으로 보냈다. 그

 

때 상급에서 지시하기를 진원 동지는 국제 형제당 당원이고, 우리 당 중앙 사회부 지하 정보공작을 책임진 영도간부이기 때문에 반드시 아무 차질 없이 목적지에 보내라고 했다. 그때 당 중앙에서 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대련에서 무전공작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1943년 4월 어느날, 심씨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장춘에 위치한 관동군 86부대 헌병대가 운영하는 무선통신 수색반이 흑석초(만주의 지명)에서 소련의 스파이가 무전으로 교신하고 있다는 정보를 감지했다. 흑석초 흥아 사진관에서 소련으로 무전을 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심씨였다. 당시 조선 사람들 중에서 소련 스파이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 헌병들은 심씨를 조사한 결과 모스크바에서 무선 통신 교육을 받았고 중공 본부가 있던 연안을 거쳐 천진에서 대련으로 들어온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만주 86부대 소속인 과학 수사반은 신징에 있었다. 이 수사반의 임무는 수상한 전파를 탐지해 소련의 무전첩자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밖에 독물반 지문반 사진반 등이 있었다. 헌병대는 6개월 동안 연합 정찰을 펼친 끝에 흥아 사진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1943년 10월 1일. 운명의 밤이 다가왔다. 86부대의 대련 헌병대와 정찰부대, 과학 수사반 70여명이 7개조로 나누어 흥아 사진관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전보 발신을 마치고 나오던 심씨를 체포했다. 사진관에 있는 심씨의 부인과 이진성 내외, 또 다른 직원 한 명이 같이 체포되었다.

 

이 날의 사건으로 당시 심양, 본시, 천진, 북경에 있던 나머지 무전 공작을 위한 위장 정보거점들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 대련 헌병대에 체포된 무전 공작원은 모두 7명이었다.

심씨를 비롯한 왕요헌과 왕학련, 이진성, 이충선, 류만회, 양학례 등 조선인과 중국인들이었다. 이 중 심득룡, 왕요선, 왕학련, 이충선 등 4명은 이듬해인 1944년 대련 헌병대의 압송되어 731부대로 끌려간 후 심한 고문을 당한 채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7. 특별수송

 

‘마루타’ 와 같은 뜻으로서 731부대의 전문용어임. 뜻은 731부대로 마루타를 운송한다는 것. 마루타는 일본관동군 하얼빈헌병대. 일본 하얼빈주재 영사관 혹은 관동군 정보부로부터 끊임없이 조달받음. 압송도구는 기차나 731부대가 자체 개발 조립한 트럭을 이용했으며 마루타에게 일본군복을 입혀 위장함 . 731부대 도착 후 특별 감옥인 7호, 8호 두 건물로 영치함. 

 

8. 증거인멸작전

 

패전이 다가오자 1945년 8월13일 이시이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함.

1, 731부대 본부는 폭파하고 포로는 전원 살해하라

2. 731부대에 재적했던 사실을 은닉할 것(내지 보작(保作)은 절대로 드러내지 말 것)

3. 공직 복귀를 금함 것

4. 부대원 상호간 연락하지 말 것

 

이 근거는 1942년부터 45년3월까지 731부대의 2대 부대장을 지냈던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중장 앞으로 보내는 연락사항으로 패전 후 군관계자가 자택에 보관해 왔던 서류가 발견되어 알려졌다. 내용을 보면 앞머리에 ‘내지 보작(保作)은 절대로 드러내지 말 것’이라고 기재돼 있는데 ’내지‘는 ’마루타‘를 뜻하는 것이며 ’보작‘은 세균작전을 가리키는 암호다

 

이시이는 감금중인 400여명의 피 실험 예비자들을 독가스로 살해한 뒤 시체를 8개 구덩이에 끌어다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버렸다. 불에 탄 시체를 당장 묻어버리기도 하고 포대(마대)에 담아 송화강 물속에 던지기도 하였다. 이시이는 문제가 될 소지가 큰 서류들을 전부 소각하고 실험 극비자료는 몸에 지닌 채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731부대는 도망하면서 고의적으로 페스트균이나 콜레라균을 지닌 쥐 등의 동물들을 방치하거나 풀어놓아 1946년 평방지구에 페스트를 유행케 하여 103명의 목숨을 또 앗아갔다. SW

 

hcw@economicpost.co.kr

시사주간 황채원 취재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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