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칼럼] 가시연꽃, 물고사리, 독미나리를 지킨 늙은 소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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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칼럼] 가시연꽃, 물고사리, 독미나리를 지킨 늙은 소나무들
  • 이정현 환경운동연합 사무부총장
  • 승인 2020.02.0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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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제에서 발견된 물고사리. 사진=전북환경운동연합
부용제에서 발견된 물고사리. 사진=전북환경운동연합

[시사주간=이정현 환경운동연합 사무부총장] ‘징게맹게 외에밋들(김제 만경 한배미 같은 너른 들)’ 이 펼쳐져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곡창지대의 중심이다. 일제강점기엔 하시모토 농장, 구마모토 농장 등 일본 자본의 수탈이 가장 극심한 곳이었다. 소출의 70%를 소작료로 냈고, 조선인 자작농의 비율은 5.8%에 불과했다. 

쌀농사를 대표하는 지역답게 삼한시대 수리시설인 벽골제와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흩어져 있다. 조선여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저수지만 수십여 개나 된다.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에 자리 잡은 부용제도 그중 하나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야트막한 매봉산 아래 낮은 곳에 자리한 부용제 농촌공사 기록상으로 1945년 축조이지만 조선시대 이전부터 존재한 오랜 저수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물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저곡가 정책과 산업화로 인해 농촌이 텅텅 비어 가는 상황에서도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해가 뜨고 저물 때까지 땅을 지키며 이 물로 포도밭에 물을 주고 농사를 지었다. 부용제 주변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백구 포도 주산지다.

부용제의 또 다른 주인은 멸종위기종 가시연꽃과 물고사리, 독미나리다. 이곳은 남방계 식물인 물고사리와 북방계 식물인 독미나리가 공존해있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드문 곳이다. 수면이 유지되던 십년 전만 해도 천연기념물인 저어새와 큰고니가 겨울 손님으로 즐겨 찾던 곳이다. 

부용제에서 발견된 가시연꽃. 사진=전북환경운동연합
부용제에서 발견된 가시연꽃. 사진=전북환경운동연합

주민들이 파내서 땔감으로 쓰던 이탄(泥炭)층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수온이 낮은 곳에 분포하는 독미나리군락이나 지하수 용출로 볼 때 평지에서는 보기 드문 이탄 습지일 가능성이 있다. 전라북도는 우수습지 선정평가 기준에 따라 ‘상’ 등급을 매겼으며 생태적 가치를 인정해서 도내  18개 우수습지에 백구 부용제를 포함시켰다. 

자연과 공존해 온 마을의 평화가 깨진 것은 2018년 8월, 김제시가 대통령의 공약인 스마트팜혁신밸리 사업에 선정되면서 부터다. 시는 부용제를 매립하고 추가부지를 확보해 스마트팜 관련 생산과 교육, 연구 기능을 모은 단지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은 이를 뉴스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 년 반, 습지를 보존하려는 주민들은 지역농업을 위협하고 부용제의 생태 환경을 훼손하는 스마트팜 사업 전면 재검토 및 부지 변경을 요구하며 힘을 다해 싸웠다. 

하루 1,000톤 지하수 개발, 멸종위기종 독미나리 전체 외부이식, 부실하고 부풀려진 기본계획, 주민동의 없는 지질조사, 시행령 개정으로 소규모환경영향평가 회피, 독미나리 부실 이식 논란 등 현장을 지키며 일방적인 사업 추진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업 자체를 원점 재검토나 대체부지 이전을 끌어내기엔 힘이 부족했다. 찬반 주민 간 갈등의 골도 더 깊어졌다. 환경영향평가를 피해 가면서 생태환경보전 대책 마련도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서로 고소와 고발도 이어졌다. 지질조사를 저지하다가 몸싸움 끝에 연행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책위는 지역 국회의원에 가교역할을 부탁하고 공론화를 통한 사업 조정을 제안했으나 두 차례 논의 끝에 성과 없이 무산되었다. 그러던 중 멸종위기종 서식 습지 보존대책과 농업과 습지를 연계한 지역발전 전략을 토론하는 자리에 전라북도가 참여하면서 협상의 물꼬가 열렸다. 

지난해 전국농민회총연맹과 환경운동연합, 전북스마트팜혁신밸리반대대책위 관계자 등이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스마트팜 혁신밸리’의 공모 중지를 촉구했다. 사진=환경운동연합
지난해 전국농민회총연맹과 환경운동연합, 전북스마트팜혁신밸리반대대책위 관계자 등이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스마트팜 혁신밸리’의 공모 중지를 촉구했다. 사진=환경운동연합

대화의 힘은 세다. 전라북도와 김제시, 농촌공사, 반대대책위는 2019년 12월 24일부터 2020년 1월16일까지 5차례 공식 협상 회의를 진행했다. 스마트팜혁신밸리 갈등 해소와 주민이 동의할 수 있는 사업 방향을 두고 치열한 토론 끝에 자연과 공존, 지역과 상생 조성에 합의를 했다. 

가장 핵심적인 합의는 습지 역할을 하는 유수지의 면적을 당초 계획보다 10배 이상 늘린 것이다. 외부로 전체 이식하려던 독미나리를 현 습지 내에 존치 시키고 인근 논을 추가 매입해서 확대한 것은 큰 성과다. 물고사리는 현재와 같은 논 습지로 유지해서 생태농업 교육공간으로 활용한다. 

대형관정으로 지하수를 뽑아 쓰는  개발 대신 농업용수를 끌어 쓰기로 했고 농촌마을 재생 지원 등 상생 협력 사업 추진, 협약 이행 추진 상황 공유 및 조정을 위한 정기적인 협의회 개최를 약속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자연 습지와 생태공원 속의 스마트팜혁신밸리” 라는 합의를 끌어냈다는 만족감보다는 습지를 온전하게 보전하지 못한 만큼 상실감이 훨씬 더 크다. 주민들의 상실감을 덜어내고 자존감을 높이는 길은 하나다. 어렵사리 합의가 이뤄진 만큼 지역 공동체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주민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착공식 이전에 구체적인 협약 이행계획 수립과 예산 조정을 통해 성실하게 추진하는 것뿐이다. 

독미나리를 찾는데 이력이 붙은 주민들은 이식작업 모니터링에 참여한다. ‘부용의 새바람’ 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생태환경과 근대문화유산을 활용한 마을 활력 사업을 시도하고 있다. ‘백구 환경지킴이’ 를 만들어 주변 난개발과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활동도 시작했다. 물고사리 원형보전지를 현재와 같은 논 습지로 유지하면서 인근 학생들과 손 모내기를 하고 추수도 같이 하는 농업과 습지 환경교육의 장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마지막도 멋졌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반목과 대립이 심했던 스마트팜에 찬성하는 주민들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무엇보다도 갈라진 공동체 회복이 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종 협약은 찬반 주민, 행정이 함께 하기로 했다. 

전북 스마트팜 혁신밸리 조성사업 최종 합의 사항 조감도
전북 스마트팜 혁신밸리 조성사업 최종 합의 사항 조감도

스마트팜 농업이 이미 우리 농업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지역 농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묻지 않고 추진되는 스마트팜 혁신밸리는 성공할 수 없다. 청년 소농도 참여할 수 있는 스마트팜 농업에 땅을 일구는 전통적인 농업의 가치를 담아낼 때 미래 농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늙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고향을 지키는 일은 남은 이들의 몫이었다.아무 조건 없이 그저 받은 대로 물려줘야 다음 세대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채 절반도 지켜내지 못했지만 이나마라도 제대로 지켜내려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대보름날이 지나면 본격적인 농사철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 낸 산수유나무는 하늘에 꽃 피울 준비를 하고 농부들은 땅에서 다시 열매를 맺기 위해 삽을 들고 나선다. SW

leekfe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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