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칼럼] 21대 국회, ‘1호 법안’ 제출 경쟁이 중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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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칼럼] 21대 국회, ‘1호 법안’ 제출 경쟁이 중요한 게 아니다
  • 오세라비 작가
  • 승인 2020.06.0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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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의안과 의안접수섽터 앞에서 제21대 국회 1호 법안 제출을 위해 박광온 의원실 직원이 대기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지난 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의안과 의안접수센터 앞에서 제21대 국회 1호 법안 제출을 위해 박광온 의원실 직원이 대기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시사주간=오세라비 작가] 2만4139건. 지난 20대 국회에 제출된 법률안 발의 건수다. 건수로는 사상 최다 법안 발의를 기록했으나, 정작 처리된 안건은 8904건으로 법안 처리율은 36.9%에 그쳤다. 나머지 법안들은 자동폐기 됐다. 20대 국회가 역대 최악의 국회로 꼽히는 이유 중 한 가지다.

지난 달 30일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21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진풍경이 벌어졌다. 의안번호 ‘2100001’을 받기 위함이다. 국회 1호 법안을 가장 먼저 제출하기 위해 국회의원들 간 경쟁이 치열하다. 다들 임기가 시작될 때마다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구호인 ‘일하는 국회’를 다짐한다. 각 의원들은 1호 법안을 선점해 상징성과 스포트라이트 효과를 동시에 얻고자 한다.

21대 국회 1호 법안 제출자는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박 의원실은 보좌진을 국회 의안과 앞에서 4박 5일 닷새간 밤샘 철야 대기를 시킨 끝에 가장 먼저 법안을 제출했다. 박 의원은 의안명에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이라 이름 지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뉴스는 국민들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했다. 입법 활동에 충실한 국회의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가장 먼저 1호 법안을 의안과에 제출했다고 그것이 본회의를 통과할까. 역대 1호 법안의 처리 실적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1호 법안 대부분은 계류 상태에서 임기 만료돼 자동 폐기된 것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박광온 의원실 보좌진 6명이 릴레이 교대에 철야 대기를 하면서까지 1호 법안을 제출했지만, 전체 국회로 보자면 지극히 초라한 실적이다. 입법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1호 법안을 제출했느냐’가 아닌, ‘무엇을 담았는지’라는 내용이다. 법률의 제정·개정의 의의야말로 국민의 권리와 의무 및 국가 재정에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국민적 합의가 형성돼야함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닌가.

국회 임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개별 의원의 1호 법안 경쟁 또한 치열하다. 21대 국회의원들의 1호 법안 제출 중 가장 눈길을 끈 의원은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역사왜곡금지법’이다. 해당 법안의 주요 골자는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폄훼하거나 피해자 또는 유가족을 모욕하는 경우 최대 징역 7년 이하 또는 벌금 5000만 원 이하의 처벌’이다. 양 의원 등 31인 의원 전원 더불어민주당이 동참했다.

그런가하면 미래통합당은 당론 차원의 1호 법안으로 소속 의원 103인 전원이 발의에 동참한 일명 '코로나19 위기탈출 민생지원 패키지법'이다. 이 법안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인해 경영악화에 처한 의원급 의료기관 및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 사업장의 사업주와 근로자가 입은 경제적 손실 일부를 지원하자는 내용이다.

필자는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홈페이지에 자주 접속해 의원들이 발의한 법률안을 모니터링한다. 20대 국회 당시에는 하루 평균 20~30건의 법안이 발의돼 법률안을 모니터링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최근 국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한지 닷새가 지난 현재, 법률안 발의 건수는 벌써 238개에 달한다. 의안정보를 클릭하면 어떤 의원이 어떤 법안을 발의하는 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지난 20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의 수준을 평가한다면 상당수가 지극히 ‘함량미달’이라 평할 수 있다. 20대 국회의원 중 ‘입법왕’으로 불리던 황주홍 민주평화당 의원은 공공기관 내 여성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유리천장 현상 해소’ 법안으로 무려 210건을 발의했다. 227개 공공기관에 개별 법안을 일일이 개정해 ‘유리천장위원회’ 설치한다는 법안이다. 그런 황 의원의 20대 국회 대표 발의 건수는 696건으로 집계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은 “쓸데없는 법안이 너무 많이 제출돼 법 같지 않은 법들만 2만 몇 건에 달한다. 이게 말이 되나”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의원들마저 서로 ‘입법 공해’라는 말도 돌 정도였다. 법률안 최다 발의는 능사가 아니다. 입법기관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법, 편향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을 제정해야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양 의원이 대표 발의한 ‘역사왜곡금지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흔히 ‘역사란 승자가 쓰는 것’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역사를 정치적으로 악용할 여지, 심하게 과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가의 책무는 반드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춰야 한다. 역사가는 무슨 일이 어떤 순서를 일어났는지에 대해 한 가지 틀로 기록하면 안 된다. 여러 얼개를 동시에 파악해 보이는 그대로, 또 진실되게 써야 한다.

영국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학은 ‘쌍안적’ 사안으로 탐구해야한다”고 했다. ‘쌍안적’ 시각이란 과거와 현대를 따로 떼어 보지 않는 두 눈, 또는 여러 개의 눈으로 통찰해야한다는 의미다. 과거의 이해는 현대의 이해를 바탕으로 비로소 가능하며, 현대 시대는 과거 시대를 보는 눈에서 출발해야한다는 것이다.

양 의원은 ‘역사왜곡금지법’ 발의 제안 이유로 “일제강점기 전쟁범죄, 5·18민주화운동 및 4·16 세월호 참사 등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왜곡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하는 행위를 처벌함으로써 올바를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피해자와 그 유족의 고통을 치유하여 국민화합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라 밝혔다. 역사적 사실을 부인 또는 현저히 축소·왜곡하거나 허위 사실 유포 행위를 처벌한다는 법률안이다.

참사 같은 역사적 사건에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법안이 의원 개인의 명성과 경쟁적인 법안 발의 분위기, 시류를 탄 이슈적 해석에 휩쓸려 헌법에 명시된 권리와 자유-'원칙'을 침해토록 둬야할까. 법안으로 이루고자 하는 정의와 가치 등 의의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타당하고 절대적인 원칙을 훼손토록 둬선 안된다. 이에 대한 제동의 책임은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의원에게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문제를 다룸에 있어 금기란 있을 수 없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토론이 요구된다. 역사의 과정에 대해 무엇이 왜곡·폄훼이며, 무엇을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의 인권과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토론과 논쟁, 다양한 평가를 할 기본적인 자유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 금기가 논쟁을 대체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양 의원의 ‘역사왜곡금지법’ 법률안에는 중대한 위헌적 소지 또한 안고 있다.

국민들은 21대 국회 임기 초반부터 발의하는 각종 법률안이나 각 정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들을 둘러싼 여러 의혹을 보면서 벌써부터 국회를 걱정하게 만든다. 21대 국회가 역대 최악의 국회로 평가받는 이전 국회의 전철을 밟지 않길 희망한다. SW

murphy8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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