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주년 기획-선열들을 돌아보다③] 후손이 전하는 이봉창 의사의 대범함,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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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기획-선열들을 돌아보다③] 후손이 전하는 이봉창 의사의 대범함, 그리고...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0.08.1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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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의 종손자 이세웅씨가 이봉창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임동현 기자
이봉창 의사의 종손자 이세웅씨가 이봉창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임동현 기자

[시사주간=임동현 기자]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 이 곳에서 내려 낙원동 방향으로 조금 가다보면 나오는 한 건물 안에 공방 작업실이 있다. 이봉창 의사의 종손자인 이세웅(65)씨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이봉창 의사의 친형인 이범태씨의 손자가 바로 그다. 이씨는 이 곳에서 금속세공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희망자들을 상대로 기술교육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획을 통해 이봉창 의사를 다시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 후손을 통해 이 의사의 실체에 더 한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거사를 앞두고 할아버지는 김구 선생님께 '아무 것도 남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랬고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지 않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 지 등을 모조리 없애달라고 했습니다. 그분에 대한 기록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의거를 이룬 이봉창 의사

1901년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서 태어난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에서 점원 생활을 했고 용산철도국 소속의 남만철도회사 견습생을 거쳐 용산역 화물계 역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과 이를 전후해 벌어진 일제의 만행들을 목격하며 이봉창 의사는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원래 말이 없는 분이셨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일본으로 떠날 때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여동생에게만 넌지시 말해주고 말없이 '사라지셨답니다'.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며 일본말을 배우고 일본 상황을 두루 살피다가 상해로 가서 김구 선생님을 만나게 됐죠. 워낙 일본말을 잘해서 김구 선생님도 처음에는 '첩자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의 애국심을 느끼고 같이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신 것이죠".

1931년 12월 이봉창 의사는 혈서로 선언문을 남긴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리고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할 폭탄 2개를 들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이미 자신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던 겁니다. 선언문도 혈서로 직접 쓰시고 웃으면서 김구 선생님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 것도 바로 자신을 비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을 실천하신 것이죠.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30이 넘은 나이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자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록도 다 없애라고 부탁을 한 것이죠. 할아버지라고 꿈이 없었겠습니까? 결혼하고 자식 낳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 아닙니까? 그 모든 것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포기하셨던 분입니다".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 선서식 후 찍은 사진.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 선서식 후 찍은 사진.

1932년 1월 8일 일본 동경 경시청 앞, 이봉창 의사는 일반 시민을 가장해 히로히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44분, 도쿄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본 이봉창 의사는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젔다. 하지만 한 발은 일왕을 명중시키지 못했고 또 한 발은 불발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실험을 했을 때는 폭발이 다 잘 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 지역이 습도가 높다는 것을 생각치 못한 게 불발의 원인이 됐습니다.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히로히토 일왕이 걸을 때 다리를 저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날 할아버지가 던진 폭탄 파편에 다리를 맞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태극기를 꺼내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친 뒤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고 그해 9월 사형선고를 받았고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향년 32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재판을 받으면서 할아버지는 '나는 너희 왕을 상대한 사람이다. 너희들이 상대할 대상이 아니다. 너희 왕을 데려와라'라며 큰소리를 치셨다고 합니다. 두둑한 배짱이셨죠. 모진 고문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김구 선생님의 존재를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아픔도 끝까지 참아내셨죠. 사형을 당하신 후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간수에게 많은 돈을 주고 결국 시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해서 지금 있는 효창공원으로 모셨습니다".

효창공원에 있는 이봉창 의사의 묘. 사진=임동현 기자
효창공원에 있는 이봉창 의사의 묘. 사진=임동현 기자

'지금 이 시점에서 이봉창 의사에게 배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세웅씨는 '애국'이라고 답했다. "나라가 잘못됐다고 비판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자신이 잘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형제간, 가족간에도 다툰다고 하지만 나라의 위기가 오면 모두 애국심으로 뭉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이 있기에 북한에게 뺏길 일도 없고 중국에게 굴복할 일도 없고 일본에게 다시 지배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굉장히 똑똑하기에 어려움에 처할 수록 제2의 이봉창, 제3의 이봉창, 제10의 이봉창이 나올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처한 문제들을 살펴봐야한다. 

이제, 문제를 살필 때다

이봉창 의사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국가는 그의 노고를 10년만에 완전히 무시했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연금이 나왔고 돈을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원래 소득이나 보상을 받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70년대 초부터 이런 혜택이 흐지부지되면서 없어졌습니다. 어쩌다 청와대에서 초청장이 오는 것이 다였습니다".

이씨의 친동생은 현재 뇌출혈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씨는 몇몇 사람들이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며 동생을 앞세워 광복회, 유족회 등으로부터 돈을 요구하고 이를 자기들 멋대로 사용하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병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이어받자는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파리들이 들끓어서 유족들을 고생시키는 게 지금 상황입니다". SW

ldh@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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