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학교폭력' 선택적 기억과 망각의 소용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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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학교폭력' 선택적 기억과 망각의 소용돌이
  • 이보배 기자
  • 승인 2021.02.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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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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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이보배 기자] 요즘 눈을 뜨면 새로운 '학교폭력(학폭)' 소식이 들린다. 스포츠계에서 시작된 학폭 논란이 연예계로 번진 모양새다. 과거에도 가수, 배우 등 연예인들의 학폭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건의 학폭 피해 주장 글이 쏟아지며 이슈가 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사실 학창시적 발생한 학교폭력은 시간이 지난 뒤라 사실관계를 증명하기도 어렵고, 제 3자의 입장에선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 온라인상에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학폭 연예인'으로 낙인 찍히기 때문에 섣부른 보도나 여론몰이가 우려되는 것도 당연하다. 

올해 들어 벌써 10건이 넘는 연예계 학폭 피해 주장 글이 쏟아지며 이슈가 되고 있는 가운데 기자도 그동안 잊고 있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중학생 시절 기자 역시 몇몇 무리에게 '왕따'를 당했던 경험이 있다. 

1980년대생인 기자의 학창시절에는 '왕따' 외에도 은근히 따돌린다는 '은따', 학교 전체가 따돌린다는 '전따' 등 다양한 방식의 따돌림이 존재했다. 이 같은 기준에 따라 엄밀히 따지면 기자는 '은따'였다. 완전한 외톨이가 아니라 어울리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를 따돌리던 몇몇 무리의 친구들은 기자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그 내용에 따라 괴롭히고, 뒤에서 쑥덕거리곤 했다. 기자와 친했던 친구들에게 접근해 달콤한 말과 물량공세를 쏟아부어 기자를 외톨이로 만들려던 노력도 이어졌다. 다행인 점은 그들의 행동에도 친구들은 끝까지 기자 곁을 지켜줬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선택적 기억'을 한다고 했던가. 그동안 기자는 이 같은 사실을 잊고 살았다.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가해자' 중 일부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기자는 이를 '망각'이라 부르겠다. 

자신이 가진 신념이나 태도에 기반해 수많은 기억 중 기억하고 싶은 내용만 기억하려 하는 '선택적 기억'과 달리 '망각'은 어떤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니까. 

서두에 말했던 중학교 시절 기자를 괴롭혔던 무리 중 몇몇을 고향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성인이 되고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였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는게 불편해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기자를 알아본 그들은 '반갑게' 인사했다. 

내가 어느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취업한 것도, 직업이 기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네가 잘 될 줄 알았어. 기자라니 너무 멋있다"는 칭찬까지 덧붙였다.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기뻐할 정도의 관계였던가. 

'아, 이들은 과거의 일을 모두 잊어버렸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 바보같지만 그때 기자는 전후사정을 말하고 사과를 요구하지 못했다.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용기를 냈어야 했다. '선택적 기억'에 갖혀 살았던 10년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망각'의 늪에 빠져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를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는 성인이다.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무엇이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온라인을 통한 폭로와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응보다 진정성 있는 대화 이후 사과와 용서가 수반돼야 한다. SW

lbb@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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