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추사 '세한도' 글귀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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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추사 '세한도' 글귀 앞에 서다
  • 주장환 논설위원
  • 승인 2021.03.10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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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사진=중앙박물관

[시사주간=주장환 논설위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쓰여 있는 글귀는 한 인간의 처절한 울부짖음이다. 그것은 지난 동짓날 필자 아파트의 정원 나무에 매달려 울부짖던 까치의 소리이다. 며칠 소란스럽게 떠들던 까치의 울음소리가 그친 뒤에야 겨울이 지났음을 알게(喜鵲聲止然後知冬天了)됐다. 그 감성의 연장선상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가 있었다.

추사의 이 글귀는 고독과 절망, 분노와 좌절이 삭고 삭아서 여한 없이 스러지는 순간, 다시 일어나 깨닫는 육중한 철학적 탈피를 보여주고 있다. 추사의 정치적 삶은 실상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종언을 고했다고 하는게 맞다. 55세 때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장장 9년동안 육지땅을 못 밟아 봤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던 제자 이상적이 있었다. 이상적은 말하자면 추사를 다시 태어나게 한 자궁 같은 역할을 했다. 당시 안동 김씨의 안테나에 걸릴 위험을 각오하고 이빨 빠진 정객을 위해 중국의 새로운 자료들을 구해서 보내주는 등 헌신한다.

<세한도>는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라는 말에서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바로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함과 동시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 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세태를 한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련은 종종 인간에게 절박함을 가져다 주고 그것은 더 깊은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아픔이 크면 클수록 깊이는 더 깊어지고 크기는 더 커지는 법이다. 명검은 수없는 시간동안 불에 달궈지고 망치질을 당해야 만들어지 는 것 아닌가? 주상절리(柱狀節理)도 용암의 분출과 수없는 파도가 수만 년 부딪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누군가는 겨울을 해체의 시간이라고 했으나, 추사에게는 오히려 응축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세한도>를 보는 우리는 추사의 그런 철학적 사유에 소름이 돋는다. 한 겨울의 적막함, 한지의 하얀 속살에 배어있는 추위, 그리고 텅 비어있는 자신의 내면을 통째로 담은 초막은 이제 한을 넘어 육중한 철학적 무게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보는 이에게 퀭하고 애틋하면서도 한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응축한 사유의 깊은 골짜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총장이 물러나자 여당과 대통령 호위집단이 더욱 더 가열차게 공격하고 나섰다.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지사와 이낙연 대표 보다 앞서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모든 흠집을 들추어낼 것이다. 선거와 공작의 귀신인 이들은 과거 이회창 아들 병역 문제 등에서 했던 마타도어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민들이 그런 공작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분노와 좌절이 삭고 삭았던 겨울이 추사에게 응축의 시간이었던 것처럼 자연인 윤석열에게도 그 응축은 그 더 큰 거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이제서야 비로소 입만 열면 정의, 공정을 내세우던 이 정부의 민낯을 알고 땅을 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는 불멸의 경고이다. SW

jjh@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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