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배의 말하는 사진] 설거지론·짬처리론에 담긴 혐오
상태바
[이보배의 말하는 사진] 설거지론·짬처리론에 담긴 혐오
  • 이보배 기자
  • 승인 2021.10.28 07:33
  • 댓글 0
  • 트위터 386,97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설거지론'으로 시작된 여성 혐오? 
여성 커뮤니티에선 '짬처리론' 등장

물체를 있는 모양 그대로 그려냄. 또는 그렇게 그려 낸 형상. '사진'의 사전적 정의 입니다.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이 생긴 이후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는데요. 가끔 피사체 외에 의도치 않은 배경이나 사물이 찍힌 경험 있지 않으신가요?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의도한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매개로 다양한 정보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보배의 말하는 사진' 지금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최근 시댁 식구들을 초대해 없는 실력이나마 발휘해 봤다. 사진=이보배 기자
최근 시댁 식구들을 초대해 손님상을 준비했다. 손님 맞이는 차리는 것보다 설거지가 더 힘들다는 것을 실감한 하루였다. 사진=이보배 기자

[시사주간=이보배 기자] 얼마 전 시댁 식구들을 초대해 없는 실력을 발휘해 한 상 차려봤습니다. 요즘에는 다양한 인터넷 앱을 통해 조리법을 볼 수 있고, 요리 유튜버들도 많아져서 따라 하기만 하면 뚝딱 음식이 만들어지더라고요. 물론 2% 부족한 손맛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요리는 쉬워졌는데 손님을 한 번 맞이하고 나면 잔뜩 쌓인 설거지거리에 한숨부터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주말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설거지론'이라는 신조어 관련 게시글이 쏟아졌다는 데 알고 계신가요? 

나이 불혹을 바라보니 신조어에 무척이나 무딘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아 얼른 찾아봤는데요. 뜻을 찾아보니 씁쓸해 지더라고요. 

이른바 '설거지론'은 연애 경험이 적거나 없는 남성이 젊은 시절을 문란하게 보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마치 음식은 다른 사람이 먹고 자신은 더러워진 그릇을 설거지 한다는 비유를 담고 있어서 '여성 혐오'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설거지론'은 '퐁퐁남' '퐁퐁단' '퐁퐁시티' 같은 신조어까지 파생시켰습니다. '퐁퐁남'은 남성 혼자 돈을 버는 외벌이인데도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경제권을 빼앗긴 뒤 용돈을 받으며 설거지 등 가사노동까지 부담하지만 부부관계 등은 소원한 남성을 말한다고 합니다. 

'퐁퐁남'이 모이면 '퐁퐁단', 이들이 많이 사는 신도시는 '퐁퐁시티'라는 식인데요. 남성들 스스로'내가 퐁퐁남이다'라고 자조 섞인 고백을 하거나 퐁퐁남끼리 서로를 조롱하는 등 남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퍼지는 것도 이번 현상 중 하나입니다. 

설거지론에 대한 분석과 패러디 글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셌는데요. 일부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설거지론에 대응하는 '짬처리론'이 부상했습니다. 

여성 혐오적 의미가 담긴 설거지론에서 성별을 바꿔 모방한 내용으로,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가 결혼할 나이가 되면 어리고 순진한 여자를 꾀어서 결혼을 하려 한다는 얘기 입니다. 

'짬처리 당한' 여성은 과거 문란한 생활을 했던 남성을 평생 책임지면서 남편이 회식, 야근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유흥업소에 갔다가 늦게 집에 들어와 독박육아에 시달리게 된다는 설명도 붙였는데요. 

짬은 군대에서 먹는 병영식을 이르는 은어 '짬밥'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짬처리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의미하니, 짬처리론의 혐오 대상은 설거지론과 반대로 남성이 되는 거지요.   

'설거지론'을 주장한 남성들은 설거지론의 요점은 '여성 혐오'가 아니라 사랑없이 남성의 조건(돈)만 바라보고 결혼한 여성의 남편에 대한 갑질 내지는 하대라고 설명합니다. 사랑 없는 결혼에 가장 대우를 받지 못하고 인간 ATM(돈만 벌어다 주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이야기인데요. 

여성의 외모나 처녀성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물타기라는 주장인데, 설거지론의 정의를 놓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수의 사회학과 교수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진단 내리기 어렵다고 손을 내저었고, 일부 교수는 "하위 문화로 보인다"고 평가 절하하기도 했는데요. 

이민아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특정 대상을 향해 비하하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스스로 만족감이나 위안을 얻는 모습"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남성들 스스로 분노나 박탈감 등을 해소하려는 작용으로 보인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면서 "변형된 여성 혐오의 일종으로 보이지만 남녀 갈등을 자꾸 부각시키는 게 맞는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경계했습니다. 

설거지론의 시작은 자신이 겪어온 혹은 자신이 겪을 지도 모를 사회적 좌절과 박탈감 해소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남성을 겨냥한 '짬처리론'까지 나오면서 그 끝은 혐오에 닿은 모양새입니다. 

결혼생활 8년차 평범한 아줌마인 제가 생각하는 설거지론은 "나 혼자 경제생활을 하면서 집안일까지 돕고 있는데, 그런 날 좀 인정해 달라"는 남편의 목소리이고, 짬처리론은 "육아와 가사 부담으로 경력이 단절된 날 좀 위로해 달라"는 아내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SW

lbb@economicpost.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