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松 건강칼럼] 이건희 신드롬 (Synd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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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松 건강칼럼] 이건희 신드롬 (Syndrome)
  • 박명윤 논설위원
  • 승인 2020.10.3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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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사진=뉴시스

[시사주간=박명윤 논설위원/서울대 보건학 박사필자는 6년 전인 2014년 5월 30일자 <靑松 건강칼럼 (354)>에 삼성 이건희 회장의 급성심근경색에 관하여 집필한 바 있다. 칼럼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성전자 이건희(李健熙ㆍ72) 회장이 지난 5월 10일 오후 10시 50분쯤 호흡곤란과 심근경색(心筋梗塞) 증세를 보여 자택에서 3분 거리에 위치한 순천향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이 회장은 병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심장마비(心臟痲痺)가 일어나 심장정지가 8분가량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상 심장정지 4분 이내에 다시 심장 순환이 돌아오지 않으면 뇌(腦) 손상이 진행되고, 7분이 넘어가면 뇌 손상이 상당히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단순한 의사소통(意思疏通)이 가능할 정도로 의식이 회복되더라도 심장정지가 4분을 넘었다면 향후 고차원적인 뇌기능까지 회복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 혈전(血栓)으로 막힌 부분이 좌전하행(左前下行) 관상동맥(冠狀動脈)의 시작 부분으로 이 혈관은 심장 기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온몸으로 깨끗한 피를 보내는 펌프 역할을 하는 좌심실의 절반 이상에 혈액을 공급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이 회장은 심장 기능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적어도 두세 달 이상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삼성서울병원 의료진은 이 회장의 혈압이 안정적으로 유지돼 심근경색 직후 달았던 인공심폐기(에크모)를 제거했다. 보통 에크모는 심장의 펌프 기능이 절반 정도만 유지돼도 제거할 수 있다. 의료진은 지난 5월 11일 심장 스텐트를 시술한 후 뇌 손상을 막기 위해 저체온(低體溫)요법을 시작해 체온을 33도 정도로 낮춰놓았다.

냉각 상태는 33도 정도로 보통 12〜24시간 유지하며, 이후 다시 12〜24시간에 걸쳐 시간당 0.25〜0.5도씩 정상 체온인 36.5도까지 서서히 올린다. 다시 체온을 회복하면서 그동안 저체온 치료를 위해 투여했던 진정제도 서서히 줄인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심폐소생술(心肺蘇生術)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하고 있다. 심폐소생술 교육은 119 소방서, 심폐소생협회, 시군구 안전체험관 등에서 받을 수 있다.

질병관리본부 통계에 따르면 급성 심장정지는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며, 2006년 1만9477명에서 2013년에는 2만7000여명으로 38% 늘었다. 이는 인구 고령화와 더불어 심근경색증의 위험 요인으로 꼽히는 비만,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등 만성질환 환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급성 심장정지는 대부분 심근경색증(心筋梗塞症)과 부정맥(不整脈)으로 발생한다. 심근경색증은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동맥경화로 좁아지거나 막혀서 생긴다. 급성 심장정지가 흔히 발생하는 시간대는 의학적으로 심혈관 기능이 불안정한 오전 6〜7시경이다. 또한 심장 정지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집으로 10건 중 6건(57.4%)이며, 그다음이 길거리나 공공장소다.

심근경색증으로 의심할 수 있는 증상에는 가슴 가운데나 왼쪽 또는 명치 끝 등에 쥐어짜는 통증(痛症)이 수 분간 지속되거나, 가슴 통증과 함께 식은땀이 나거나 호흡곤란이 생긴다. 고령자(高齡者)의 경우에는 심한 통증보다 구토나 메스꺼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심장 정지로 인한 뇌 손상을 줄이기 위하여 뇌에 혈액 공급이 끊기기 시작하는 4〜5분 이내에 적절한 응급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즉 급성 심근경색증이나 심장 정지 환자가 발행하면, 최초 목격자은 119에 구급 요청부터 하며, 나머지는 응급처치에 매달려야 한다.

환자가 숨을 편히 쉴 수 있는 자세를 유도하고 목 앞 정중앙에서 바깥으로 두 손가락 너비 떨어진 부위를 눌러 심장 박동을 확인한다.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으면 즉시 심폐소생술을 해야 한다. 심폐소생술을 할 줄 모르면, 구급대원이 올 때까지 양손을 깍지 낀 채로 환자의 가슴뼈 중앙 아래쪽을 3〜5cm 깊이로 빠르게 눌렀다 떼기를 1분에 100회 이상 반복한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99년 삼성서울병원 검진에서 폐암(肺癌)으로 진단되어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항암 치료를 받았다. 고령(高齡)인 이건희 회장(72세)은 수년 전부터 ‘건강 이상설(異狀說)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번에는 심장 시술까지 받아 ‘포스트(post) 이건희 시대’ 삼성의 미래와 리스크 관리가 국내외 관심사로 떠올랐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10월 25일 78세(1942.1.9-2020.10.25)를 일기로 별세했다. 먼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례도 고인의 뜻을 고려하여 간소하게 가족장(家族葬)으로 28일에 진행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운구 행렬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과 자택, 이태원동 승지원 등을 차례로 돌아 화성 반도체공장을 거쳐 마지막 종착지인 수원 선산에 도착했다. 수원에는 삼성전자 본사가 있으며, 선영에는 조부(祖父)가 잠들어 있다. 이날 전국 각지에 있는 삼성 사업장에는 고인을 기리는 조기(弔旗)가 걸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추모하는 의미로 스위스 로잔에 있는 ‘올림픽하우스’의 오륜기(五輪旗)를 조기로 게양한다고 밝혔다. 고인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기간 중 IOC위원으로 선출돼 문화위원회, 재정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2014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후 투병 중이던 2017년 IOC 위원직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그해 명예위원으로 위촉됐다.

토마스 바흐(Thomas Bach) IOC 위원장은 성명에서 “이건희 IOC 명예회원의 사망 소식에 깊은 애도를 보낸다”고 밝혔다. 이어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IOC의 톱 파트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올림픽을 전 세계에 홍보하고 스포츠와 문화의 유대를 증진함으로써 올림픽 성공을 이끌었다”며 “고인의 올림픽 유산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45세 때인 1987년 11월 이병철(李秉喆, 1910-1987) 삼성그룹 창업자가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경영권을 물려받아 2014년 5월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27년간 삼성그룹을 이끌며 글로벌 1등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병철 회장이 장남(長男) 상속의 관행을 깨고 파격적으로 후계자로 막내아들 이건희를 선택한 것은 이건희에게서 ‘무언가’를 보았을 것이다. 삼성그룹은 1938년 3월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 세운 삼성상회(三星商會)에서 출발하였다.

1980년대 초반 제2차 석유 파동은 국내 기업 활동에 치명타를 가했다. 삼성도 마찬가지여서 기획실 직원들도 전자제품 방문판매를 직접 하러 다닐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그러나 그때 삼성 창업주(創業主) 이병철 회장은 의외의 선택을 하여 반도체(半導體)에 삼성의 운명을 걸기로 한 것이다.

반도체 사업은 1-2년 안에 성패가 결정되는 사업이 아닌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까닭에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병철 회장은 “평범한 사람, 평범한 조직은 1년, 2년 후를 보지만, 똑똑한 사람, 똑똑한 조직은 10년, 20년 후를 내다본다.”고 말했다. 지금의 삼성은 30여 년 전 이병철 회장의 ‘멀리 내다보는 삶’에 의해 탄생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세계 최빈국 한국에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던 산업화(産業化)의 1세대의 거목이었다면, 이건희 회장은 재벌 오너 2세 경영자였지만 수성(守成)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1류 DNA’를 심으려 우리나라 기업을 세계 정상에 오르게 한 혁신의 1세대 기업가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당시에는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언제까지나 기술 속국(屬國)으로 있을 순 없다. 사재(私財)를 보태겠다”며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여 결국 반도체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고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한국 사회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일갈(一喝)했다. 4류 정치, 3류 행정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과 임직원들의 뼈를 깎는 노력 덕분이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4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교세라(Kyocera) 출신 40대 디자이너인 후쿠다 다미오(福田民郞) 당시 삼성전자 고문을 처음 만났다. 후쿠다는 1991-93년 4건의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이 회장은 보고 받지 못했다. ‘후쿠다 보고서’는 삼성 경연진에 조언하는 공업 디자인 전략 보고서로서 당시 일류(一流) 기업인 소니(Sony)와 파나소닉(Panasonic)을 베끼기에 급급한 이류(二流) 기업 삼성과 경연진의 행태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현재 후쿠다 다미오는 교토공예섬유대 명예교수이다.

‘후쿠다 보고서’의 핵심은 14쪽 분량의 ‘經營과 Design’이며, “마누라와 지식 빼고 다 바꾸라”는 삼성그룹의 신(新)경영을 촉발했다. 이건희 회장은 이류(二流)에 안주하는 경영진에 대해 크게 화를 냈다. 그리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호텔에 200여 임원을 모아놓고 2주간 토론과 질책을 했다. 이 회장의 메시지는 “양(量)떼기로 싸게 수출하고 파는 건 집어치우라”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극약 처방을 써가며 끝까지 변화와 혁신 유전자를 심었고, 삼성은 세계 1위를 노리는 조직으로 변했다.

이건희 회장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번은 학계ㆍ문화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외부인과 식사를 했으며, 각 방면 최고의 인재로부터 이야기를 ‘경청(傾聽)’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고인이 회장 취임 10년째 되던 해인 1997년에 발행(동아일보사, 1997.10.20)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의 평소 생각과 경영철학을 담은 에세이 100여편이 담겨있다. 발행 당시 판매 정가는 6500원으로 현재는 절판되어 중고 책을 10배가 넘는 가격을 줘야 간신히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온라인상에서도 고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거워 그의 별세 사실이 알려진 25일 오전 10시부터 이날 오후 4시까지 네이버ㆍ다음 등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비스된 기사들에 달린 댓글은 약 18만개에 달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국격도 높였다.”고 했다.

특히 젊은 대학생들은 그를 ‘현대판 이순신’에 비유하며 구국의 영웅으로 칭하고 있다. 이 회장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동안 삼성을 둘러싼 각종 수사, 압수수색, 재판 관련 뉴스만 접했던 청년들이 이 회장의 업적을 다룬 언론 기사들을 보고 그의 기업가 정신에 열광했다.

재계와 정ㆍ관계 인사들도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결과 한국도 미국ㆍ일본ㆍ독일 등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 회장이 남기고 간 ‘1등 정신’이라는 유산을 되새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이 회장이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경영 능력이 재조명받는 ‘이건희 신드롬(syndrome)’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 최빈국이 반세기 만에 기술 강국 이미지를 갖게 된 데는 삼성(三星)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세계 브랜드 가치 순위는 1위 Apple, 2위 Amazon, 3위 Microsoft, 4위 Google 그리고 5위가 Samsung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이 된 원인 중 하나는 록펠러, 카네기, 포드 등 기업가를 위인(偉人) 대접을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이건희 회장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므로 그가 기업인으로서 남긴 공과(功過)를 공정한 잣대로 평가하여 ‘공’은 취하고, ‘과’는 성찰하면 된다.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SW

pmy@sisa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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