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조선어학회한말글수호기념탑, 선열들 거룩한 뜻과 정신 기리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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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조선어학회한말글수호기념탑, 선열들 거룩한 뜻과 정신 기리고자.
  • 시사주간
  • 승인 2014.08.3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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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만, 세종대왕의 품으로 돌아와.

[시사주간=문화팀]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맞선 조선어학회 애국선열 33인이 72년 만에 세종대왕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윤재 ▲한징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이중화 ▲이우식 ▲이인 ▲김법린 ▲김양수 ▲김도연 ▲장현식 ▲장지영 ▲정열모 ▲김윤경 ▲이석린 ▲권승욱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이병기 ▲서승효 ▲윤병호 ▲이은상 ▲정인섭 ▲서민호 ▲안재홍 ▲김종철 ▲권덕규 ▲안호상 ▲신현모 선생들이다.

한글학회는 29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서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을 제막했다. 올해는 1942년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애국선열 33인이 수난을 겪은 지 72주년이 되는 해다.

서울시와 한글학회는 일제강점기에 목숨을 걸고 우리말·우리글을 지켜낸 조선어학회 선열들의 거룩한 뜻과 정신을 기리고자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을 세웠다. 세종대왕 동상 옆으로 세종대왕을 기리는 세종로에 탑이 세워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한글에 대한 역사적인 공간인 세종로 일대에 기념탑이 세워져 뜻깊다"면서 "한글 교육관 등 진행 중인 한글 관련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기념탑 제막식은 세종로 일대가 세계인이 찾는 한국 관광 명소로 발돋움하는 출발점"이라면서 "우리 얼과 문화가 녹아 있는 역사적인 장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종택 한글학회 회장은 "조선어학회 애국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국어는 현대화됐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을 할 수 있었기에 우리는 불과 두 세대 만에 처참한 가난을 극복하고 선진 경제 문화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선현들의 고귀한 정신이 알려지는 것이 늦은 감이 있다"면서도 "이제라도 전해져 다행이다. 한국어가 파괴되고 비속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기념탑은 귀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탑은 10m 높이의 청동과 오석 재질로 이뤄졌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금돼 탄압을 받은 33인의 이름과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투쟁기, 옥중 고문기 등이 새겨 있다. 황규연씨가 대표 작가로 나섰고, 이웅배 국민대 교수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탑명 글씨는 한내 허경무 박사가 새겼다.

세종로공원 앞 인도에서는 조선어학회 선열 인물 전시회도 열렸다.

조선어학회는 1921년 12월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한글학회의 전신이다. 처음에는 '조선어연구회'였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글표기의 기준이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0여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됐다. 광복 후 1949년 한글학회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33인 중 신현모(1894~1975) 선생은 자서전에 "참으로 보배로운 학자들이 청빈한 가운데 민족의 생명인 우리말을 가꾸고 지키는 데 온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진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고 썼다. "우리말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말 모음 그리고 큰사전 편찬은 일제 하에서 우리민족이 이룩한 사업 중에서 알토란 같은 업적이 아닐까 한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의 참담함도 전했다. 생전의 신현모 선생은 "(서울) 화동에 있던 어학회관이 수색돼 관계 연구자료와 큰사전 원고 등 일체의 연구업적이 압수되고 관계자 33명이 함경도 홍원경찰서로 묶여갔다. 13명이 기소돼 각각 6년에서 2년의 체형을 선고받았으나 불복 공소 중에 8·15를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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